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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혁연 초빙교수 "선진학자 최명길, 환향녀 강제이혼 반대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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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수 작성일2023.03.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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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 진행 : 이호상 기자

■ 2023년 3월 30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라디오 충북역사 기행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이호상 : 저희가 2주마다 한 번씩 전해드리는데요. ‘라디오 충북역사기행’시간입니다. 오늘도 조혁연 교수님 연결돼있습니다. 조 교수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십니까?

 

▶조혁연 : 네, 안녕하세요.

 

▷이호상 : 교수님 잘 지내셨죠? 저희가 지난 주에 청주 출신 최명길 조선중기 대표적인 주화파죠. 최명길 관련이야기 나눠봤는데 오늘은 ‘최명길과 화냥녀’에 얽힌 이야기를 준비했다고요. 우리 역사에 화냥녀가 등장하는데 화냥녀에 대해서 생소한 분들도 계실텐데, 화냥녀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거죠?

 

▶조혁연 : 화냥녀가 지금은 욕으로 많이 쓰이는데요. 본래는 병자호란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호상 : 제가 교수님 인터뷰 전에 공부를 해보니 화냥녀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공했을 때 그때 끌려간 여인들이 포로 석방 이후 몸이 더럽혀졌다라는 의미에서 멸시당했던 그런 여성들을 칭했던 아픔이 있는 단어더라고요? 일단 화냥녀가 언제부터 등장하는 지 설명 좀 해주시죠. 

 

▶조혁연 : 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있었고 그 이후 삼전도 치욕 쯤부터 등장하는데요. <인조실록>은 삼전도 치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그리고 이어지는 기록은“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이렇게 쓰여있었는데, 여기서의‘북쪽’은 청나라를 말합니다.

 

▷이호상 : 교수님 그런데 청나라가 우리 양민들,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포로로 잡아간 이유, 또 그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였을까요? 

 

▶조혁연 : 지리상 발견 이후 유럽의 제국들은 인간을 상품취급을 했는데 이른바 그래서 노예무역이 성립됩니다. 청나라도 정묘호란 때부터 이런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요. 압록강 부근의 포로, 인간시장을 개설해놓고 베 60여필을 가져오면 우리 백성을 풀어줬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기강이 문란해 베 두 필을 내면 군대를 안갔는데요. 베 60여필은 그것의 30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이호상 : 그러게요. 제가 알기로는 엄청난 여성들을 청나라가 포로로 데려갔는데, 왜 이렇게 포로로 끌고 갔을까요?

 

▶조혁연 : 나중에 장차 이들을 베하고 교환하기 위해서 적어도 수 만명의 포로를 압록강 너머 청나라로 데려갔고요. 그리고 나서 앞서 이야기한 베60여필을 가져오면 포로를 하나 하나 풀어주었습니다. 이 경우 가난한 사람은 결국 자기 가족을 데려올 수 없게 되는 거죠.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나라 백성들이 많이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이호상 : 결국은 노예무역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당시 우리 양민들, 서민들 엄청난 부담이었을텐데 우리 백성들이 많이 돌아올 수는 있었나요? 어느정도 돌아온 기록이 있나요? 여성들이? 

 

▶조혁연 : 일부 있었습니다. 주로 부유한 집에서는 베를 내고 돌아왔는데 <인조실록> 6년 4월 3일 자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포로를 데리고 오면 사들이겠다.」고 하였으므로 이번에 2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 나머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도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우리나라 국경을 쳐다보면서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가 하늘까지 닿는 듯했습니다.”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호상 : 우리나라 국경을 쳐다보며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가 하늘에 닿는 듯했다라는 표현이 있었군요. 돌아오신 분들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돌아온건데 그 돌아온 분들도 사회적으로 폄하됐던 것 아닙니까?

 

▶조용환 : 네. 그래서 이때 ‘환향녀’소리가 나오는데요.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성을 ‘돌아올 환’, ‘고향 향’, ‘계집녀’ 자를 쓴 ‘환향녀’이렇게 불렀는데요. 이 환향녀가 변한 말이 지금의 욕말이 된 ‘화냥녀’이다. 그런데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사대부나 양반가에서는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속출했습니다. “정조를 더럽힌 몸으로 자기집의 제사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호상 :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일반 양민들도 대부분이겠지만, 최상층 지도자들, 지도자 여성층들도 포로로 끌려갔던 거 아닙니까? 

 

▶조용환 : 네. 한 사례를 보면요, 당시 인조때에 우의정으로 장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유라는 사람은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상소를 했습니다.

 

▷이호상 : 이게 그 당시에 폄하되고 했던 분들인데, 그 고충을 겪었는데도 돌아와서도 그 고통을 평가했던 아픔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교수님 보니까,‘화냥녀’가 지금은 욕으로 쓰이는데 말이죠, 교수님 원고를 보니 우리가 ‘호로자식’ 그런 욕도 쓰지 않습니까? 이것도 병자호란때 나온 단어라면서요?

 

▶조용환 : 네. ‘호로자식’을 우리고장에서는 ‘후레자식’ 이렇게 발음을 하는데요. 그런데 원말은 ‘호로자식’인데요, ‘호로’는 ‘오랑캐 호’, ‘포로 로’ 자입니다. 즉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가 낳은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어찌보면 화냥녀보다 더 심한 욕이 되는데요, ‘베값을 주고 귀국해서 청나라 남자의 자식을 낳았다’는 뜻이 되니까요.

 

▷이호상 : 교수님 말씀하시니까, ‘오랑캐’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왔는데, 조선시대 오랑캐가 사실은 위쪽 청나라 사람으로만 알고 있는데, ‘오랑캐’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조용환 : 저는 오랑캐하면, 만리장성 북쪽의 북방민족을 지칭하는데요, 그런데 오랑캐는 본래 만주 북쪽 산림지대에 살았던 ‘오리양히’ 족이 있습니다. 이 ‘오리양히’족을 발음한 것이 ‘오랑캐’가 됩니다. 그런데 이 ‘오리양히’족은 산림지대에서 수렵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유학, 즉 성리학적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랑캐는 ‘야만’ ‘미개’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청나라도 만주에서 일어났으니까 오랑캐 국가가 됩니다. 그런데 반면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은 성리학을 수용했으니까 소중화이고, 오랑캐 국가는 아니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호상 : 거기서 선진의식을 갖고 있던 학자들이 있었던건데요. 다시 돌아와서 최명길 학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요. 그당시에 전국에 환향녀에 대한 이혼 상소, 강력히 반대하는 이런 분들도 있었다면서요?  그 중심에 우리 고장 출신 촤명길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조용환 : 네. 소수만 그렇게 했는데요.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자에서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최명길은 말이죠,“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라고 이혼을 반대합니다.

 

▷이호상 : 그런데 최명길이 그렇게 중심에 서서 주장을 하는건데요. 제가 궁금한 것이, 그렇다면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최명길과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신 지식인도 꽤 있었을까요

 

▶조용환 : 네. 대다수는 강제 이혼을 지지했는데요.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자에는 그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자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호상 : 재미있네요. 그런데 교수님, 시간이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아요. 최명길 환향녀와 관련된 이야기, 다음시간에 다시 한번 더 이어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조용환 : 네. 준비해 보겠습니다.

 

▷이호상 : 알겠습니다. 교수님 시간 때문에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조혁연교수와 라디오 충북 역사기행 떠나봤는데요, 오늘은 우리 고장 출신, 최명길과 '환향녀'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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