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여행스케치] - 김선권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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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현철 작성일2021.12.02 조회917회 댓글0건본문
여행 그려주는 남자, 로드그래퍼 – BBS불교방송 ‘여행스케치’ 최초의 사액서원, 영주 소수서원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이호상 기자
□ 프로그램 : 청주BBS 충북저널 967
□ 인터뷰 시간 : 12월 2일(목) 08:41 ~ 08:52
[앵커]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나와계십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앵커]
작가님 오늘은 어디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
오늘은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 가보겠습니다.
[앵커]
소수서원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 가보았다. 알고 있다 정도.
[김]
제가 전에 ‘한국의 서원’이란 타이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돈암서원에 대해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소수서원도 그때 돈암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앵커]
소수서원, 돈암서원 말고도 여러 곳이 함께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
경상남도 함양군의 남계서원, 경상북도 경주시의 옥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광역시의 도동서원, 전라남도 장성군의 필암서원, 전라북도 정읍시의 무성서원 그리고 전에 소개해드렸던 충청남도 논산시의 돈암서원과 오늘 소개해 드릴 경상북도 영주시의 소수서원까지 해서 모두 아홉 곳입니다.
[앵커]
언급해 주신 서원들을 들어보니까 특히 경북지역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원래 많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안동지역은 퇴계 이황 이래로 그의 제자들이 영남학파를 주도하였고 그로 인해 서원의 설립이 많았습니다.
서원의 수가 많아지면서 서원의 질적 저하가 가속화되자 영조 17년에 훼철령으로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가 정조 때에 복설과 신설 등으로 다시 늘어났으며,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훼철령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는데, 영남은 13개소만 남게 되었습니다.
서원은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발전적인 의미로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정치권과의 연계와 신분유지기구로 그 기능이 변화되면서, 18~19세기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앵커]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무리 영남지역이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 인근이 인구가 많아서 서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중에 하나도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
그것은 두 번째 이유에서 설명됩니다.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게 대원군이잖아요. 그런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는 서원의 타락 외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앵커]
정치적인 의도라면?
[김]
대원군은 노론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론의 근거지가 서울 경기 지역이었습니다. 대원군은 남인을 등용했는데, 남인의 근거지가 영남지역이었죠. 이런 이유로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서원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앵커]
그렇군요. 서원의 존립에도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있었네요. 서두가 길었네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소수서원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김]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길이 나타납니다. 낙락장송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어 마치 공원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길을 통해 학교에 간다면 공부할 기분이 날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길입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계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로도 불립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이 끝날 무렵, 서원에서는 보기 힘든 것과 마주하게 됩니다. 당간지주입니다.
[앵커]
당간지주라면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내걸기 위해 만든 것인데, 그것이 왜 서원에 있을까요?
[김]
지금 소수서원이 자리한 곳에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폐사가 되어 터만 남은 숙수사지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입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 당간지주 반대쪽으로는 봉우리라고 하기엔 민망한 높이의 영귀봉(靈龜峰)이 있습니다. 거북이가 알을 낳는 모습이라고 해서 이곳에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앵커]
요즘 아들딸을 구별해서 낳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만, 그리고 미신이지만, 자식을 원하는 분들께서는 찾아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김]
이제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을 통해서 강학당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학당(講學堂)은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세운 건물입니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강학당이라 하였습니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큽니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죠.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렀고, 배흘림기둥이 인상적입니다.
강학당에서는 선비 복장을 하신 어르신께서 글 읽기를 하고 계셔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원본은 아닙니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동은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기 이전 이름입니다. 사액이란 왕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말합니다. 편액이란 요즘의 의미로 한다면 간판 정도가 되겠죠.
[앵커]
배흘림기둥하면 부석사가 생각나는데, 아~ 부석사도 영주에 있네요. 배흘림기둥이란 말은 들어보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는 청취자분도 계실 거 같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김]
기둥은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곧은기둥과 흘림기둥입니다. 곧은기둥은 기둥의 직경이 일정한 것을 말하고, 흘림기둥은 기중의 직경이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흘림기둥 중에서 민흘림기둥은 아래로 갈수록 직경이 증가하는 기둥이고, 배흘림기둥은 땅에서 1/3지점까지 증가하다가 다시 감소하는 기둥이고, 중배흘림기둥은 가운데가 가장 볼록한 기둥을 말합니다.
강학당 뒤편으로는 일신재,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가 있는데, 서원에서 ‘재(齋)’자가 들어간 현판을 단 건물은 오늘날의 기숙사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서원의 선생님과 서원의 임원인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이고, 학구재와 지락재는 원생들의 숙소인데, 직방재와 일신재보다 한척(一尺) 낮게 뒷물림해서 지어졌습니다.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조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앵커]
이따금 사제지간의 도리를 벗어난 사건의 소식에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건물을 지을 때조차도 사제간의 도를 생각했던 조상님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이제 영주의 음식을 소개해주실 시간입니다.
[김]
영주는 인삼과 한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앵커님도 풍기인삼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앵커]
풍기인삼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 들어보았다, 처음 듣는다 정도.
[김]
풍기인삼과 영주한우를 이용한 인삼불고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끓으면서 인삼 냄새가 솔솔 나는데 특이한 경험입니다. 쓴맛은 없고 오히려 달콤합니다. 영주산 사과즙과 감초를 우려서 단맛을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뒷맛이 상당히 깔끔합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이용한 석갈비도 있는데 아래 팽이버섯, 양파, 인삼을 깔고 그 위에 조리가 되어 불향을 머금고 있는 석갈비를 얹어서 서빙됩니다. 매운맛과 순한 맛이 있는데 모두 만족스러운 맛입니다.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이호상 기자
□ 프로그램 : 청주BBS 충북저널 967
□ 인터뷰 시간 : 12월 2일(목) 08:41 ~ 08:52
[앵커]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나와계십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앵커]
작가님 오늘은 어디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
오늘은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 가보겠습니다.
[앵커]
소수서원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 가보았다. 알고 있다 정도.
[김]
제가 전에 ‘한국의 서원’이란 타이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돈암서원에 대해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소수서원도 그때 돈암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앵커]
소수서원, 돈암서원 말고도 여러 곳이 함께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
경상남도 함양군의 남계서원, 경상북도 경주시의 옥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광역시의 도동서원, 전라남도 장성군의 필암서원, 전라북도 정읍시의 무성서원 그리고 전에 소개해드렸던 충청남도 논산시의 돈암서원과 오늘 소개해 드릴 경상북도 영주시의 소수서원까지 해서 모두 아홉 곳입니다.
[앵커]
언급해 주신 서원들을 들어보니까 특히 경북지역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원래 많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안동지역은 퇴계 이황 이래로 그의 제자들이 영남학파를 주도하였고 그로 인해 서원의 설립이 많았습니다.
서원의 수가 많아지면서 서원의 질적 저하가 가속화되자 영조 17년에 훼철령으로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가 정조 때에 복설과 신설 등으로 다시 늘어났으며,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훼철령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는데, 영남은 13개소만 남게 되었습니다.
서원은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발전적인 의미로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정치권과의 연계와 신분유지기구로 그 기능이 변화되면서, 18~19세기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앵커]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무리 영남지역이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 인근이 인구가 많아서 서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중에 하나도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
그것은 두 번째 이유에서 설명됩니다.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게 대원군이잖아요. 그런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는 서원의 타락 외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앵커]
정치적인 의도라면?
[김]
대원군은 노론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론의 근거지가 서울 경기 지역이었습니다. 대원군은 남인을 등용했는데, 남인의 근거지가 영남지역이었죠. 이런 이유로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서원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앵커]
그렇군요. 서원의 존립에도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있었네요. 서두가 길었네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소수서원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김]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길이 나타납니다. 낙락장송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어 마치 공원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길을 통해 학교에 간다면 공부할 기분이 날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길입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계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로도 불립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이 끝날 무렵, 서원에서는 보기 힘든 것과 마주하게 됩니다. 당간지주입니다.
[앵커]
당간지주라면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내걸기 위해 만든 것인데, 그것이 왜 서원에 있을까요?
[김]
지금 소수서원이 자리한 곳에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폐사가 되어 터만 남은 숙수사지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입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 당간지주 반대쪽으로는 봉우리라고 하기엔 민망한 높이의 영귀봉(靈龜峰)이 있습니다. 거북이가 알을 낳는 모습이라고 해서 이곳에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앵커]
요즘 아들딸을 구별해서 낳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만, 그리고 미신이지만, 자식을 원하는 분들께서는 찾아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김]
이제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을 통해서 강학당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학당(講學堂)은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세운 건물입니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강학당이라 하였습니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큽니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죠.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렀고, 배흘림기둥이 인상적입니다.
강학당에서는 선비 복장을 하신 어르신께서 글 읽기를 하고 계셔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원본은 아닙니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동은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기 이전 이름입니다. 사액이란 왕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말합니다. 편액이란 요즘의 의미로 한다면 간판 정도가 되겠죠.
[앵커]
배흘림기둥하면 부석사가 생각나는데, 아~ 부석사도 영주에 있네요. 배흘림기둥이란 말은 들어보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는 청취자분도 계실 거 같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김]
기둥은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곧은기둥과 흘림기둥입니다. 곧은기둥은 기둥의 직경이 일정한 것을 말하고, 흘림기둥은 기중의 직경이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흘림기둥 중에서 민흘림기둥은 아래로 갈수록 직경이 증가하는 기둥이고, 배흘림기둥은 땅에서 1/3지점까지 증가하다가 다시 감소하는 기둥이고, 중배흘림기둥은 가운데가 가장 볼록한 기둥을 말합니다.
강학당 뒤편으로는 일신재,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가 있는데, 서원에서 ‘재(齋)’자가 들어간 현판을 단 건물은 오늘날의 기숙사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서원의 선생님과 서원의 임원인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이고, 학구재와 지락재는 원생들의 숙소인데, 직방재와 일신재보다 한척(一尺) 낮게 뒷물림해서 지어졌습니다.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조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앵커]
이따금 사제지간의 도리를 벗어난 사건의 소식에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건물을 지을 때조차도 사제간의 도를 생각했던 조상님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이제 영주의 음식을 소개해주실 시간입니다.
[김]
영주는 인삼과 한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앵커님도 풍기인삼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앵커]
풍기인삼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 들어보았다, 처음 듣는다 정도.
[김]
풍기인삼과 영주한우를 이용한 인삼불고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끓으면서 인삼 냄새가 솔솔 나는데 특이한 경험입니다. 쓴맛은 없고 오히려 달콤합니다. 영주산 사과즙과 감초를 우려서 단맛을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뒷맛이 상당히 깔끔합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이용한 석갈비도 있는데 아래 팽이버섯, 양파, 인삼을 깔고 그 위에 조리가 되어 불향을 머금고 있는 석갈비를 얹어서 서빙됩니다. 매운맛과 순한 맛이 있는데 모두 만족스러운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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